[일본소설] 슬로하이츠의 신 - 츠지무라 미즈키
작년 <아침이 온다>를 아주 재미있게 읽어서 관심이 갔던 작가 '츠지무라 미즈키'.
이번에 읽은 <슬로하이츠의 신>은 색다른 즐거움과 감동이 있었다. 같은 작가가 쓴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장르, 문체, 분위기 등 모든 것이 너무도 달라 놀라웠다.
<슬로하이츠의 신>은 젊은 예술가들이 한 지붕 아래 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인기 각본가 '아카바네 다마키'를 중심으로 소설가, 만화가, 화가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친구가 되어 함께 살게 된다.
'자신이 믿는 세계'를 완성하려는 젊은 창작가들의
치열하기 때문에 더없이 눈부신 날들과
그리고 미스터리한 사건들
상, 하권으로 되어 있고 주연급 인물들이 꽤 많이 등장하며 각각의 에피소드도 많다. 하지만 크게 복잡한 느낌 없이 술술 읽히는 가독성은 <아침이 온다> 때처럼 역시나 좋았다.
사실 상권에서는 후반까지 가서도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쉽게 읽히기는 해도 스토리가 진척되지 않는 느낌이라 좀 지루한?.. 기승전결이 있다면 기와 승의 사이 어디쯤.. 뭔가 이쯤에선 흥미로운 게 하나 나와야 하는데...
상권에선 각 캐릭터들의 성격과 라이프 스타일, 그들의 인간관계에 대해 장황하다 싶을 만큼 길게 끌고 가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상권을 다 읽은 후에는 하권까지 마저 봐야 하나 싶었는데 많은 리뷰들에서 꾹 참고 끝까지 보라는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한 믿음의 결과는 대성공!!
하권에서는 속 시원할 정도로 빠른 스토리 전개에 훅 빨려 들어갔다. 그냥 하권이 다 했다!! 그리고 다 읽고 나니 상권이 그리 지지부진했던 까닭은 이유가 있었다. 상권에서 작가는 무수히 많은 복선의 떡밥들을 뿌려놨고 마지막에 가서 아주 깔끔하게 다 수거가 된다.
당신 눈에는 사소하게 보이겠지. 하찮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그런데 내 친구들은 모두 필사적이야. 자신의 무기는 뭘까. 그걸 생각하며 소설을 쓰고 만화를 그리고 세상에 필사적으로 관여하려 해. 이것이 자신의 무기임을 깊이 생각하고 그것으로 호소하지 못한다면 정말 자기 인생은 어떻게 해야 할까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어.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꿈을 꿔 버린 이상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오늘도 책상 앞에서 씨름하고 있다고.
그 때문에 지기 싫어하는 성질이 심해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되고, 충돌하고, 스스로를 소모시킨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간다. 이 방법으로 세상에 관여하길 소망했기 때문에. 소망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좌절하고 체념하고 타협하는 것은 거짓말을 해서 손에 넣은 행복이나 즐거움보다 분명 가치가 있다.
- 다마키 -
나는 예술가들이 가지는 예민한 감수성, 창작의 고뇌 같은 것은 잘 모르지만 그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세상과 관여하기 위한 자신의 무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에서 마음이 뭉클했다. 그게 어디 예술뿐일까.. 모두 저마다 자신의 분야에서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해나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초심을 되돌아보게 했고.. 나는 과연 그토록 좋아하는 일, 이루고자 하는 소망이 있는 것일까, 다마키처럼 무엇인가를 버팀목으로 삼고 살아왔다고 얘기할 만한 것이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남자 지요다 고키. 나는 고키에게 푹 빠졌다. 고키의 대사 하나하나가 마음을 파고드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나 따뜻하고 편안하며 무해한 캐릭터!!
나 실은 제법 압니다. 이 생활이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으니까요. 언젠가는 끝이 옵니다. 그것이 오지 않을 경우에는 상황이 바뀌지요. 나쁜 일이 그러하듯 그 대가로 생기는 좋은 일도 끝이 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섭리에 어긋나고, 무엇보다 계속되는 것이 꼭 좋다고만 볼 수는 없거든요.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무조건 그렇게 됩니다. 나는 제법 잘 압니다.
- 고키 -
분노가 동기일 때는 의외로 분노만으로는 그 상태가 오래가지 않게 마련이거든요. 다마키의 경우 창작 의욕은 분노에서 기인한 것이 맞겠지만 그뿐만이 아닐 겁니다.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분노 이상의 다른 것을 섞어야 하거든요.
유머나 사랑 같은. 우리가 그것에 익숙한 거였으면 좋겠습니다.
- 고키 -
결과적으로 다마키와 고키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있었던 것이고, 고키는 다마키에게 키다리 아저씨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만 알고 그녀는 모르는 그들의 과거 이야기는 정말이지 눈물 나게 아름다웠다. 너무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긴 했으나 그래서 더 좋았다는!!!
다마키에게 고키는 힘겨운 삶을 버티게 해 준 버팀목이었고, 고키에게 다마키는 추락한 자신을 끌어올려 다시 설 수 있게 해 준 은인이었던 것.
그 두 사람이 다시 재회한 순간은 감동을 넘어 카타르시스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엄청 심장 두근두근이었다.
이 소설은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얽혀 있어 추리적 재미도 있다.
1. '고키의 천사'는 과연 누구?
2. 고키의 라이벌 작품 '다크웰'의 작가는 누구?
3. 고키를 모방한 작가 '고도 지카라'는 누구?
1번은 너무 쉽고, 답은 뻔히 나와 있지만 이것을 어떤 에피소드로 풀어낼지가 궁금했는데 과연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요. 어떻게 이런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것인지!!
2번은 아주 의외. 그렇지만 지나고 보니 꽤 떡밥들이 있었다. 근원으로 삼을 만한 어둠은 갖고 있어....
3번은 고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불온한 거래의 결말.
마음에 깊은 여운이 남았다. 그저 감동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눈물이 나도록 서글픈 기분이 드는 책도 있었다. 생각하게 하고 계속 고민하게 만드는 책도 있었다. 그것이 해피엔딩, 새드엔딩에 관계없이 책을 다 읽은 뒤의 느낌이 엄청나게 좋았다.
- 다마키 -
버팀목이 없었더라면 오늘날까지 살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것이 버팀목이라니 한심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다마키는 안다.
"나는 지요다 고키를 읽고 그것을 버팀목으로 살아왔습니다"
- 다마키 -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와 특히 공감이 갔다.
"읽어보지도 않고서 쉽게 얘기하지 마"
"읽고 싶은 책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는 예전에 정말 추리소설만 읽었었다. 코로나 시기 갓 돌을 지난 아이와 단 둘이 집에 갇혀 지낼 때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힘든 시기를 버텼다.(물론 나름 열심히 육아도 하면서^^)
대화할 친구도 없었고 자존감도 많이 낮아져 있던 시기, 책에 빠져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그 시간들이 현실에서의 도피라면 도피일 테지만 그 도피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나도 있다고 본다. 그게 올바르건 올바르지 않건 관계없이, 나는 추리소설을 읽는 그 시간들 덕분에 조금이나마 성장했다고 믿고 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누군가에겐 그 사람을 지탱하는 큰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 외 하이라이트 문구
그것은 스티그마, 즉 성흔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마음속 깊이 새겨진 기억. 평소에는 아물어 있다가도 문득 떠올리면 피가 뿜어나는 것.
- 가노 -
내가 선택했고 내가 결정한 길이니까. 괜한 겸손은 그만 떨기로 했지.
- 다마키 -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들여다볼 수 있어. 그걸 동기부여의 계기로 삼을지 말지는 둘째치더라도, 근원으로 삼을 만한 어둠은 갖고 있어."
마음속에 있는 우물에서는 언제든지 시커먼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다. 그러나 머리를 너무 깊이 넣었다가는 어둡고 깊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두 번 다시 기어 올라오지 못하리라. 그 물은 마셔서는 안 된다.
- 가노 -
너무 단순하고 충동적이라 실소가 나오는 결심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도 아카바네 다마키를 뒷밤침하고 있다. 아무리 무모해도, 그것이 정말 무모하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은 지고 만다. 절대 양보해서는 안 되는 스스로에 대한 쐐기인 것이다.
- 다마키 -
나에 관한 것은 잊어야 한다. 간절한 심정으로 그 옛날 그녀를 향해 빌었다. 그 마음에 거짓은 없었다. 삶 속에 즐거움을 발견하고 현실을 살아가며 도피의 문학 같은 것은 몽땅 봉인하기를.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녀는 잊지 않은 것이다. 계속 기억하고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곳까지, 지요다 고키 앞까지 제 힘으로 왔다.
- 고키 -
세상 모든 이야기의 주제는 결국 사랑이잖아
- 마사요시 -
분노만으로는 지속되지 않는다. 유머나 사랑으로 버텨야 한다.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진 걸까.
인생에 적이 있으면 그 또한 즐거운 법이다.
여행길을 즐기는 자는 강해진다. 앞길에 적이 늘어날수록 달성했을 때 돌아오는 것 또한 클 것이다.
눈에 보이는 변화와 보이지 않는 변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시간을 같은 장소에서 공유한 기억은 그 모든 것을 삼키면서도 희미해지는 일 없이 계속된다. 그것을 기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