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올해 들어 엄청 빠져있는 작가 '야쿠마루 가쿠'의 <어느 도망자의 고백>을 리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밀리의 서재에 없어서 오랜만에 종이책으로 읽었어요^^
저자 : 야쿠마루 가쿠
번역 : 이정민
출판 : 소미미디어
출간 : 2022.07.27.
원제 : 고해(告解)
일본 초판 : 2020.4.
원제는 <고해>인데요. 일본 소설의 원제와 번역된 제목을 볼 때면 항상 느끼는 것이, 일본 원제는 좀 심플한 반면 우리나라에서 번역될 때는 좀 더 전체를 아우르는 상징적인 제목으로 번역되는 것 같아요.
여기서 '어느 도망자'란 누구일까가 핵심 포인트입니다. '어느 도망자'의 정체에 대해선 리뷰에서 얘기해 볼게요~~
1. 줄거리/개요(출처: 출판사 서평)
대학생 '마가키 쇼타'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놀고 귀가한 밤, 여자친구의 메시지가 날아든다. '지금 당장 날 보러 오지 않으면 헤어지겠다'는 메시지를 본 쇼타는 술이 깨지 않은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는다. 차를 몰고 가던 중 무언가를 치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공포로 인해 그대로 그곳을 떠난다. 그리고 다음 날, 쇼타는 뉴스를 통해 자신이 친 것이 길을 건너던 81세 노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미래, 가족의 행복, 연인의 웃음... 죄를 인정하면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들이 너무도 많았던 쇼타는 경찰에 붙잡히고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서 계속해서 눈을 돌리기만 한다. 그러는 한편, 피해자의 남편 '노리와 후미히사'는 한 가지 '결심'을 마음에 품고 쇼타가 출소할 날만을 기다리는데...
누구나 사건의 가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가해자가 된다면,
당신은 자신이 저지른 죄와 똑바로 마주할 수 있을까요?
- 야쿠마루 가쿠 -
2. 리뷰
가독성이 진짜... 대박입니다. 페이지가 막 넘어가요. 멈출 틈을 주지 않고 쭉쭉 읽게 됩니다. 야쿠마루 가쿠의 필력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360쪽 정도로 분량도 길지 않고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한 큐에도 다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재미와 가독성이 최고였어요.
물론 재미있게 읽은 반면 다소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요. 뒤에 가서 이야기할게요^^
주인공 '마가키 쇼타'는 뺑소니 사망사고를 일으키게 되는데, 그의 직접적인 가해의 배경은 프롤로그 5페이지에서 전부 그려집니다. 1장에서 이미 재판이 끝나고 징역형을 선고받아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는 내용들이 속도감 있게 전개됩니다. 이어지는 2장에서는 곧바로 5년의 세월이 흘러 쇼타가 출소하는 날부터 다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 후에 그려지는 것은 '속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가 속죄의 마음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은 평탄하지 않죠..
1.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범죄 사고,
만약 당신이 가해자가 된다면?
쇼타는 음주운전 중에 사고를 일으키고 도망쳐 81세의 노인을 죽게 했습니다. 그에게 내려진 벌은 징역 4년 10개월. 사람을 쳤다는 인식이 있었음에도 도망친 뺑소니범이지만 흉악 살인범은 아닙니다. 이런 일은 생각해보면 우리 주위, 우리 가족과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살인사건을 일으킨 가해자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잔인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라든가, 자신은 이런 상황까지는 절대 맞닥뜨리지 않을 거라던가, 즉 전혀 다른 세계의 일로써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의 사건은 누구든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사망사고의 가해자가 될 수 있지만 그 리스크를 항상 염두에 두고 핸들을 쥐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만약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쇼타처럼은 절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이처럼 야쿠마루 가쿠는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사건을 가져와 범죄 사고에 경각심을 갖게 하고, '만약 당신이라면?' 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야쿠마루 가쿠의 주특기라고 할 수 있죠..^^
2. 죄에서 계속 도망치는 쇼타
도저히 피해자 유족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유족은 틀림없이 온갖 욕설을 퍼부을 것이다. 여기서 더 고통을 받으면 새로운 걸음을 내디딜 곳이 없어지고 만다.
- 141쪽 -
아무리 음주 운전을 했다 해도 비가 오지 않고 그때 나나가 울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쇼타는 그렇게 생각했다.
- 348쪽, 쇼타 -
사람을 죽게 해 놓고 운이 나빴을 뿐이라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쇼타에게 화가 치밀었어요. 결국 재판에서도 '사람을 친 줄 몰랐다, 신호가 파란불이었다'며 거짓 증언을 합니다.
노리와 기미코라는 여성에게도 인생이 있었다. 그대로 살아 있었더라면 전하고 싶은 것이 많았을 테고, 그녀가 뭔가 전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많았으리라. 그 기회를 내가 빼앗았다. 나는 얼마나 큰 죄를 저지른 걸까. 그로 인해 나는 교도소에 5년 가까이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큰 죄에 상응하는 벌이었을까.
- 226쪽, 쇼타 -
그러나 쇼타는 점점 알게 됩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가 피해자의 인생뿐 아니라 피해자 유족과 가해자 가족들의 인생까지도 망쳐놓았다는 것을요. 하나의 범죄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인생을 뒤틀어 놓는지.. 그것에 대해 끈질기게 추궁해 나가는 소설이에요.
분위기가 닮은 책은 역시나 가해자 혹은 가해자 가족의 시점에서 다룬 '야쿠마루 가쿠'의 <침묵을 삼킨 소년>, <우죄>,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 정도를 들 수 있겠네요.
3.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속죄하기 위한 쇼타의 용기
"왜 간병 관련 일에 취직할 생각을 했어? 3D 업종으로 알려져 있어서 전과가 있어도 쉽게 채용해줄 줄 알았나?"
"아뇨.. 얼마 전부터 계속 생각했습니다. 나에게 가장 괴로운 일,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일까 하고요. 그건 제가 죽게 한 81세 여성과 비슷한 사람들을 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그 사람들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시험하고 싶었습니다:"
- 251쪽 -
쇼타가 요양 시설에서 일하고자 한 것은 자신이 죽게 한 '노리와 기미코' 같은 고령자를 돕는다면 조금이나마 속죄가 되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을까요..
도망치면 안 된다. 아무리 비난받아도, 그로 인해 마음이 아무리 상처 입는다 해도...
내일 노리와를 만나러 가자. 그리고 그 노인의 마음을 전부 받아내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격한 증오나 슬픔이나 분노일지라도. 나는 그럴 만한 일을 저질렀으니까.
- 342쪽, 쇼타 -
그렇습니다. 속죄하기 위한 첫걸음은 증오와 슬픔, 분노의 마음을 전부 받아내는 것부터일 것입니다. 그게 아무리 괴로울지라도 말이죠.
4. 피해자의 남편 '노리와 후미히사'의 진의
(스포 있음)
내가 과연 이 한을 풀 수 있을까. 오랜 세월 동안 가슴에 응어리져 풀리지 않는 이 한을. 마가키 쇼타를 만나야 한다. 그가 죄의식에 몸부림치고 고통받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한 뒤에 이 한을 풀지 말지를 정할 것이다. 내가 죽기 전까지 이 한을 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저세상에 가도 기미코와 후미코를 만날 수 없으리라.
- 197쪽, 노리와 후미히사 -
후미히사는 쇼타가 죄의식에 고통받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탐정에게 조사를 의뢰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호프 탐정소'의 '고구레'!!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했더니 제가 전에 리뷰했던 야쿠마루 가쿠의 <악당>에서 나온 그대로입니다ㅎㅎ 내용도 살짝 비슷해요ㅋㅋ
후미히사는 정체를 숨기고 쇼타가 살고 있는 연립주택의 옆집으로 이사를 가기에 이릅니다. 자, 과연, 후미히사는 쇼타에게 아내의 복수를 하려는 걸까요? 후미히사는 자신의 한을 풀고자 하는 오랜 염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지 장애가 빠르게 진행되어, 아내에게 일어났던 일과, 자신의 오랜 염원마저 잊어 갑니다.
후미히사 : 고통스럽지 않은가.. 자기 마음을 속이는 일이. 나는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네. 이 총검에는 수많은 사람의 피가 들러붙어 있지.
쇼타 : 전쟁.. 이군요..
- 346쪽 -
전쟁 때 중국에 출정하여 수많은 사람을 살육한 죄. 상관의 명령은 곧 천황의 명령. 종전 뒤 재판에서 도망쳐 악행을 숨기고 산 후미히사는 평생 자신이 저지른 죄로 괴로워합니다. '렌조 미키히코'의 <백광>과 아주 닮은 느낌이었어요. 전쟁은 참 무섭습니다...
후미히사 :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누군가에게 내 죄를 고해하고 싶었네. 그런데 가족에게는 차마 할 수가 없었지.
쇼타 : 왜 저를 선택하신 건가요?
후미히사 : 나처럼 죄 많은 인간이기 때문이야. 나처럼 죄로 인해 고통받는 자가 아니면 이야기할 수 없네.. 이제껏 누구와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자네와 하고 싶었네. 그리고 자네에게 전하고 싶었어. 나처럼 고통받기 전에.. 만약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되면 그럴 때마다 나처럼 끝없는 고통에 시달리지 않도록... 그것이 내가 무참히 죽인 사람들에 대한, 나 때문에 죽은 기미코와 후미코에 대한,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라고 생각했네.
- 350~351쪽 -
마지막에 후미히사의 진의가 밝혀지는데요.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싶었다는 후미히사.. 과거의 죄로 인해 평생 망령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그러나 마음만은 짐승만이 되지 못했던, 어느 도망자의 슬픈 고해였습니다.
5. 눈물이 주룩주룩.. 아버지의 편지
네가 사고를 내고 나서 나는 내내 도망만 다녔다. 부모의 책임으로부터, 너로부터, 가정으로부터, 일과 세상으로부터 도망쳐왔어. 그런 삶을 계속하는 가운데 아버지는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단다.
웃지 못하게 되더구나.
그래. 계속 도망치는 한 사람은 진심으로 웃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죄를 지은 아들에게 이런 걸 바라다니, 피해자 유가족에게 죄스럽지만, 아버지로서는 언젠가 네가 진심으로 웃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 340쪽, 쇼타의 아버지 -
쇼타의 출소 후에도 부자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결국 아버지는 죽고 맙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쇼타는, 마침내 자신이 빼앗은 목숨에 대해서 그 죄의 깊이와 생명의 존엄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쇼타에게 편지를 남기게 되는데 편지 읽으면서 눈물이 주룩주룩ㅠㅠ
쇼타가 사고를 일으키고부터 아들과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계속 도망쳐 온 아버지. 제목의 '어느 도망자'란 당연히 노리와 후미히사를 가리키는 것이겠지만, 쇼타가 될 수도, 쇼타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는 거겠죠.
죄를 지은 자식이지만 그래도 자식이기에.. 자식의 행복을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절절히 묻어 나왔습니다.
6. 죄와 벌, 속죄에 대해서 (스포 있음)
만약 훗날 쇼타에게 다쿠미의 존재를 밝힌다면 그것은 그가 갱생의 길을 걷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여야 한다. 정규직으로 취직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저지른 죄를 제대로 마주하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나 또한 죄를 마주해야 한다.
- 298쪽, 구리야마 아야카 -
쇼타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 보낸 한 여자의 어리석은 문자로 시작된 사건. 그녀 또한 죄의식을 느끼며 지금껏 외면해온 자신의 죄와 마주하게 됩니다.
왜 죄 많은 내가 아니라 죄도 없는 아이의 목숨을 빼앗느냐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지. 그러자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네. 내가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기를 바랐다고, 그게 나에 대한 진정한 벌이라고 말이야. 목소리의 주인이 내가 죽인 자들의 망령임을 깨달았지.
마음의 문제라네. 망령은 실재하지 않아. 망령은 마음속에 있지. 죄를 짓고 자기 마음을 속이는 자는 불행한 일이 생기면 자신의 죄에 대한 응보라고 생각하지.
- 349~350쪽, 노리와 후미히사 -
쇼타는 출소 이후에도 자신의 비참해진 인생에 대해 불안해하고 괴로워하긴 하지만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지는 못합니다. 그러다 아버지가 죽게 되자, '내가 대신 죽었다면..'이라며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에게 내려진 벌이라고 생각하게 되죠. 앞으로 계속 소중한 사람을 잃을 때마다 후미히사가 그랬던 것처럼 쇼타 또한 자신의 죄에 대한 응보라고 생각하며 평생 괴로워할 겁니다. 이것이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쇼타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진정한 벌일지도 모릅니다.
속죄는 마음의 문제이겠죠. 결국 그 마음은 당사자 본인밖에 알 수 없습니다. 어려운 문제이고 그 결말에 정답은 없겠지만 속죄란, 자신의 죄와 똑바로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요?
스토리 전개 상 아쉬웠던 점 (스포 있음)
1. 쇼타가 아야카의 문자를 받고 나가게 된 경위를 재판에서 끝까지 밝히지 않은 점이 좀 의아해요. 쇼타처럼 겁 많고 나약한 인간이..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라고 하기엔 이유가 납득이 잘 안 됐습니다.
2. 이 소설의 주제인 '속죄'를 위해서는 '노리와 후미히사'가 꼭 필요한 존재였지만 후미히사가 쇼타의 출소 때까지 5년을 기다리고 그의 옆집으로 이사하면서까지 자신의 한을 풀려고 했다는 설정이 조금.. 왜 굳이 그렇게까지..라는 느낌으로 억지스러운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어요. 제가 느끼기에는요.
3. 구리야마 아야카.. 초반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문자로 독자들의 속을 후려치더니, 나중엔 쇼타의 아이를 낳아 버렸다는 뜬금 시추에이션??
쇼타를 속죄의 길로 끌고 가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뭐랄까 현실성이 없었어요. 쇼타의 사고 자체는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설득하며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후의 아야카와 후미히사의 행보는 현실 세계와 거리가 먼, 그야말로 영화나 드라마입니다.
4. 가장 답답하고 이해가 안 된 인물은 후미히사의 장남 '노리와 마사키'입니다. 89세의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아무리 거부하기로서니 요양 시설이나 집에 모시지 않고 혼자 지내게 둔다는 게 '이런 불효자 같으니라고!!' 생각했어요ㅋ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에 이번에도 실패했다'는 식으로 나올 때마다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상식적으로 치매 노인이 자식들 몰래 가해자 옆집으로 이사를 가서 몇 달씩 생활한다는 게.. 결국 아버지가 위험한 순간에 와서야 방문 요양 보호사를 부르고 홈캠을 설치한다느니 하는 말을 듣고 진작에 좀 그렇게 하지 싶었어요. 스토리를 위해 어쩔 수 없었겠지만, 결말을 위해 이야기를 맞춰 가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쇼타에게 '이제 충분하지 않냐'라고 하는 장면도 저는 좀 고개가 갸웃? 했어요. 내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인간이.. 아버지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몇 년간 묘소에 꽃을 두고 갔다고 해서, 충분하다고, 이제는 이름을 바꾸고 살라며 말할 수 있는 일일까요?
3. 그 외 인상적인 문장들
아버지는 그 이름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그 원인을 제공한 내가 쉽게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분간 지금 이름으로 내 나름대로 살아볼게..."
- 135쪽 -
만나러 가봤자 유족한테 욕이나 들어먹겠지. 그랬다가는 다시 일어설 수도 없거니와 노동 의욕을 잃을 뿐이야. 그리고 자네가 죽게 한 사람은 81세의 할머니라며? 그 사고가 없었다 해도 그리 오래 살았을 가능성은 낮아. 그런데 자네는 20대라는 귀중한 시기에 5년 가까이 감방에서 썩었으니 수지가 안 맞을 만큼의 속죄를 한 셈이야.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하지 마.
- 187쪽, 마에조노 -
아무리 울어도, 아무리 부르짖어도, 아무리 원통해해도 이미 늦었다.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전할 수 없고, 세상을 떠난 사람의 마음은 그 무엇도 전해지지 않는다.
- 224쪽, 쇼타 -
앞으로 만날 일이 없을 테니 지금 말할게. 우리 가족은 너 때문에 불행해졌어. 그런데 가장 불행한 건 우리도, 더욱이 너도 아니야.
- 225쪽, 아쓰코(쇼타의 누나) -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려고 모처럼 갱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건만, 왜 이런 형태로 멈춰야 하나. 왜 나만 이렇게 궁지에 내몰려야 하나. 똑같이 사람을 죽게 한 마에조노는 자기 죄를 뉘우치지 않고 초연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저쪽에 가면 더 편해지지 않을까. 자신이 저지른 죄를 반성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하는 편이 훨씬 살기 편할지도 모른다.
- 295쪽 -
내가 해온 짓은 짐승만도 못한 짓이었지. 그런데 저지른 행위는 짐승이지만 안타깝게도 마음은 짐승이 되지 못했네. 자네는 망령을 보나? 자네가 목숨을 빼앗은 내 아내의 망령 말이야.
나처럼 자네도 마음은 짐승이 되지 못한다는 거야. 그로부터 세월이 70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나는 여전히 망령을 봐. 내가 죽인 사람들의 망령을... 망령이 나타날 때마다 나는 변명을 했지. 나도 전쟁 때문에 부상을 당했다, 나도 피해자였다, 야만의 시대였다, 그 당시 일본이라는 나라가 잘못되었다고. 그런데 아무리 변명해도 망령은 사라지지 않았지.
- 348쪽, 노리와 후미히사 -
마사키 : 그때 아버지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나?"
쇼타 : 저를 인간으로 되돌려주셨습니다. 그뿐입니다."
- 359쪽 -
오늘 리뷰는 상당히 길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 할 말이 너무 많았나 봐요.. 아쉬운 점도 적어 보았지만 사실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재미있었기 때문에야말로 관심과 애정을 듬뿍 담아 개인적으로 느낀 스토리 상의 아쉬운 점도 주제넘지만 얘기해 보았구요.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은 항상 읽고 나면 거기서 끝이 아닌, 묵직한 여운이 남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줘서 좋아요.
무겁고 어려운 주제이긴 하지만,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져보며 의미 있는 독서 시간이었어요^^
오늘도 저의 길고 긴~ 리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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