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유즈키 아사코
번역 : 권남희
출판 : 이봄
출간 : 2021.08.25.
일본 초판 : 2017.04.13.
1. 범죄 실화를 모티브로 한 소설, <버터>
<버터>는 2009년 일본 매스컴에서 이른바 '꽃뱀 살인사건'이라고 불린 '수도권 연속 의문사 사건'의 범인 '기지마 가나에'를 모티브로 한 소설입니다.
이 시기는 제가 딱 일본에 있었을 때로 여기저기서 사건 이야기로 크게 떠들썩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기지마 가나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꽃뱀'의 이미지가 아니라 평범한 옷차림과 화장기 없는 얼굴, 무엇보다 100킬로가 넘는 몸무게로 세간의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기지마가 뚱뚱하고 못생겼어도 상냥하고 요리를 잘했으며 결혼상대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으며 기지마에게 1억엔 이상의 돈을 갖다 바쳤다고 하네요..
기지마 가나에는 사귀던 남성들을 대상으로 3건의 살인, 7건의 사기 및 사기미수 용의로 기소되어 2017년 최종 사형 판결을 받고 현재 복역 중입니다.
그녀는 놀랍게도 옥중에서 무려 3번이나 결혼을 했는데요. 3번째 남편은 심지어 그녀를 취재한 유명 주간지의 기자라고 하네요. 처자식까지 있는데 이혼하고 기지마와 결혼했다네요😨
진짜 어마어마한 여자...
기지마는 사건 이후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으며, 그녀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와 소설, 심지어 법정증언기록까지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기지마 가나에 법정증언> 2013년 발매
표지 사진은 체포 당시의 기지마의 실제 모습
<소돔의 사과> 2013년 방영
기지마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
2. 책 줄거리
(출처 : 출판사 서평)
주간지 기자 '마치다 리카'는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꽃뱀 살인사건의 용의자 '가지이 마나코'의 독점 인터뷰를 준비 중이다. 리카는 세간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꽃뱀 수법'이 아니라, 그 사건에 떠도는 여성 혐오를 다루고자 한다. 가지이 마나코에게 사기 피해를 입은 남성들은 거액의 돈을 바치면서도 '외롭게 살아서 노후를 돌봐줄 사람이라면 아무리 못생겨도 좋았다. 밥을 해줄 가정적인 여자라면 아무라도 좋았다'며 그녀를 끊임없이 무시하는 발언을 했고, 이 사건에 대한 논쟁은 남녀 간 의견 대립으로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치소에 수감 중인 가지이는 취재를 거부하는 데다가 특히 여성 기자에게는 냉담하다. 리카는 사실 이 사건에 깔린 사회적 배경도 배경이지만 가지이에게서 어떤 압도적인 느낌을 받는다. 여자는 날씬해야 한다고 누구나 사회에 세뇌된다. 뚱뚱한 몸으로 살아가겠다는 선택은 상당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가지이는 무엇보다 그런 자신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타인의 시선에 압사당하는 현대인들과 달리, 그녀는 타인을 압도하고 있었다.
직장에 다니다가 결혼과 동시에 퇴직한 대학 친구 레이코의 조언으로 마침내 가지이를 만나게 된 리카는 그녀로부터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는다. 면회를 갈 때마다 '버터'가 들어간 요리들을 맛보거나 직접 해먹어보라는 제안을 하나 둘 실행하면서 리카의 몸무게는 가지이처럼 늘어간다. 갇혀 있는 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리카. 이 둘 사이에는 점점 묘한 동료애와 긴장감이 쌓이기 시작한다..
성을 무기로 살아가며 그 사실을 감추지 않는 가지이 마나코에게 격렬한 경멸과 동시에 전율도 느낀다.
'나라는 여자'의 몸은 특별한 가치가 있고 상대는 확실히 멋진 체험을 할테니, 그것을 주고 돈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조금도 나를 깎아내리는 행위가 아니다. 가지이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3. 리뷰
우선 가독성이 좋았습니다. 600페이지 정도의 긴 분량이었는데 내용이 흥미진진하고 긴박감 넘치는 장면도 많아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어요. 또한 작가인 유즈키 아사코는 원래 음식 소설로 유명한데요. 그래서 요리와 맛에 관한 묘사가 상당히 많이 나와요. 맛 표현이 어쩜 이리 다채롭고 감미로운지~~
리카가 옥중의 '가지이 마나코'를 취재하면서 그녀에게 영향을 받아 변화해가는 과정, 리카의 친구 레이코를 비롯해 다양한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리카의 심리 변화와 내면의 성장을 개연성 있게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해요.
살인의 수법보다는 사건의 바탕에 깔려 있는 배경을 쫓는 과정이 흥미로웠어요. 중반부까지는 가지이가 범인인지 아닌지, 피해자들이 자살인지 타살인지에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사건의 진실은 이야기의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었습니다.
미스터리적 요소와 함께 여성 혐오, 젠더 갈등, 가부장제 등 사회적 문제를 비롯하여 자기성찰적이고 철학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어 독서 토론하기에도 좋을 것 같아요!!
인상적인 문장도 너무 많았는데요..
몇 가지 테마로 나눠서 얘기해 볼까 합니다~~
1. 제목은 왜 '버터'인가?
제목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니 왜 제목이 버터인지도, 버터일 수밖에 없는지도 알겠어요. 고소하고 진한 버터는 그만큼 고칼로리라 마냥 계속 먹기에는 좀 부담스럽죠.. 여자들에게 버터란 행복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준다고 해야 할까요.. 여자들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역할과 내면의 진짜 욕망을 찾아나가는 여정을 버터가 가지는 양면성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 같아요.
책을 읽으면서 필연적으로 계속 버터가 먹고 싶어집니다!! ㅎㅎ 머릿속이 온통 버터로 요리되는 느낌~!! 책을 읽는 분들은 아마 다들 같은 경험을 하실 거예요~~ 간장 버터밥, 버터 명란 파스타, 시오 버터 라멘, 애쉬레 버터... 실제로 전 평소 잘 먹지도 않는 버터를 구입했을 정도예요ㅋㅋ
가지이 : 당신은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하지 않아? 그래야 맞지도 않는 사람과 데이트하느라 자신을 소모하는 게 아깝다는 걸 절감하게 될 거야. 자존감이 너무 낮은 거 아냐?
리카 : 글쎄요, 그 사람을 놓치면 다음 사람을 만날 자신이 없어요. 기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야 여성이면 누구나 당신처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감을 갖고 행동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가장 어려운 거 아닐까요.
가지이 : 그런 거 간단해. 노력이나 정신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그 순간에 가장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으면 돼. 귀를 잘 기울이고 내 마음과 몸에 물어보는 거야. 먹고 싶지 않은 건 절대 먹지마. 그렇게 결심한 순간부터 몸도 마음도 달라지기 시작할걸.
2. 가지이 마나코를 통해 '버터'를 체험하게 되는 리카
가지이 마나코는 본인이 여성임에도 여성 혐오자이며 뚱뚱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합니다. 그런 점이 리카를 비롯해 독자로 하여금 압도당하게 만듭니다. 저 또한 책을 읽으면서 가지이에게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늘어놓는 말들이 궤변 같으면서도 뭔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어요.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면 취재에 응하겠다는 가지이의 요구에 따라 리카는 '버터'가 들어간 요리들을 차례대로 맛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리카는 10킬로 이상 몸무게가 늘어나고 살찐 몸을 보며 주위의 시선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남자친구마저 자기 관리가 중요하다며 몸에 대해 은근슬쩍 비난을 하기도 하죠.. 이제야 조금씩 먹고 싶은 음식을 먹게 되었을 뿐인데 말이죠..
리카는 음식을 통해 조금씩 자기 내면의 욕망과 마주하게 됩니다.
역시 자신은 어딘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살찐 몸은 솔직히 말하면 그리 싫지 않다. 목욕할 때 문득 눈에 들어오는 자신의 허벅지나 뱃살이 안에서부터 눈부시게 빛나며 욕조에서 보글보글 물방울을 만들 때, 꼭 애쉬레 버터 같다 싶어 넋을 잃고 보았다. 주위에서 그렇게 말이 많지 않다면 이대로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했다.
- 리카 -
3. 리카의 트라우마
리카는 가지이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괴로웠던 기억과도 맞닥뜨립니다. 이혼 후 홀로 남겨진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것,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그래서 그 죽음에 대해 마음 한 구석에 계속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온 것.
리카는 아버지의 죽음이 트라우마가 되어 요리를 하고 음식을 즐기는 것을 줄곧 피해왔던 거죠. 가지이를 만나 자신이 과거에 묶인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게 됩니다.
가지이 : 당신은 살인자야. 나와 거의 마찬가지야. 자신을 긍정하고 싶어서 내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것뿐이야. 내가 무죄가 되면 저절로 자신도 용서할 수 있게 될 테니, 일석이조겠지.
레이코에게 "너는 잘못하지 않았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지금 훨씬 더 구원받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 자신은 아버지를 이 손으로 죽였다. 그 사실을 리카는 처음으로 냉정하게 받아들였다. 마치다 리카는 살인자다. 하루도 잊은 적이 없고 자신을 용서할 수도 없지만, 그를 죽임으로써 리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나, 가지이 취재 때문에만 살찐 거 아냐. 지금까지 요리하고 먹는 것을 즐기는데 죄책감이 있었어. 혼자서 내가 오기만 기다리다 죽은 아버지가 생각날 것 같아서 싫었어. 그런데 말이야, 나, 맛을 보거나 몸에 뭔가 흡수하는 게 좋아졌어. 지금 다이어트는 할 생각이 없어. 적당량을 발견할 때까지 이대로 있을래.
4. 가부장제의 폐해 - 여성의 돌봄과 가장의 책임
리카의 아버지는 이혼 후 제대로 식사도 하지 않고 건강을 해친 탓에 혼자 죽어갔고 그때 주위로부터 어머니가 들어야 했던 비난들.. 여자가 돌보지 않아서 남자를 죽게 했다(남편 건강은 아내가 챙겨야 한다는 이런 인식이 바로 가부장적 사고방식에서 온거죠)
'여성의 돌봄'을 당연시하는 가부장제, 그 속에서 힘든 것은 비단 여자만은 아닐 거예요. '가장으로서 책임을 져야해! 가족들에게 약한 소리를 해서는 안돼!'와 같은 이른바 '가장의 책임' 또한 남성을 억누르는 가부장적 사고방식이겠죠.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간 작품에서 여성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 왔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분노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남자도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버터'의 집필 의도 중 하나다"라고요.
일본 여성은 강한 인내와 노력과 고지식함과 금욕과 동시에 여자다움과 부드러움, 남성을 돌보는 것까지 온갖 미덕을 당연한 듯이 요구받고 있어요. 도저히 양립시킬 수 없어서 다들 괴로워하는데도 노력을 강요받고 있죠. 그러나 당신을 보고 있으면 확실히 알겠어요. 양립시킬 수 없는 게 당연하다는 걸. 그렇게 한들 우리는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는 걸.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걸.
대체 가정적이란 게 뭘까요? 가정적인 맛이니 가정적인 여성이니..
가족의 형태가 이렇게 다양화된 오늘날엔 아무 실체도 없는 거잖아요. 형태 없는 이미지에 휘둘려서 남자도 여자도 압박을 느끼고 괴로워해요. 사실 이 사건의 본질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5. 가지이에게 친구가 있었더라면
아래는 가지이가 얼마나 남녀차별적이고 가부장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인지 알 수 있는 대사입니다.
나는 남자를 기쁘게 해주는 게 즐거워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일'이 아니야. 남자를 돌봐주고 지탱해 주고 따스하게 감싸주는 것이 신이 여자에게 내린 사명이고, 그걸 완수하는 것으로 여자는 모두 아름다워질 수 있어요. 말하자면 여신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지. 최근 까칠한 분위기의 여자들이 늘고 있는 건 남자의 사랑이 아쉬워서 그래요.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지. 여자는 남자의 힘을 절대 이기지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해요. 조금도 부끄러운 게 아니야. 차이를 인정하고 그들을 용서하고 즐겁게 해주고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서면 놀라울 만큼 자유롭고 풍요로운 시간이 기다려요.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니까 다들 괴로운 거지. 일이네, 자립이네 안달을 하니까 충족되지 않는 거고, 남자를 압도해버리니까 연애가 멀어지는 거야. 남자도 여자도 이성이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자각해야 해. 버터를 아끼면 요리가 맛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다움이나 봉사 정신을 아끼면 이성과의 관계는 빈곤해진다는 걸 대체 왜 모르는 거지. 내 사건이 이렇게도 주목받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다하지 않는 여성이 늘어난 탓이라고!
- 가지이 마나코 -
항상 외톨이였고 동성과의 관계가 힘들었던 가지이는 어떤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남자들과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성을 혐오하게 된 것은 일종의 방어기제가 아니었을까요?..
남자와의 교제 또한 그 속에 어떤 정신적 교감이라던지 미래를 함께 그려나가는 모습은 없습니다. 단지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고 싶은 것을 함께 먹고 남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로 떠받들어주며 정성스러운 요리로 남자의 심신을 달래주죠.
정작 자기 자신은 돌보지 못한 채 말이죠..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한, 혹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위한 요리는 해 본 적이 없었고 그저 자신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남자들을 위해서만 요리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기 보다는 가지이의 생존 방식이었겠죠.
당신에게 레이코 같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있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그런 식으로 무리하게 혼자 마무리 지으며, 사건 하나하나를 자신의 손으로 무리하게 닫아나갈 필요도 없었을지 모르죠.
누구보다 성실하게 요리 수업에 임했지만, 마음껏 만들어서 대접할 사람이 없었어요. 그건 당신 인생 전부에 해당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네요.
가지이 마나코가 악인이란 것은 틀림없고 구제불능의 인격체일지도 모르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여자..
6. 자신을 돌보기 위한 변화의 첫걸음
가지이와 형태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살아온 리카는 가지이를 통해 스스로의 욕구와 마주하게 되고 자신의 감정에 더 솔직해지고자 노력해요. 변화의 첫걸음은 요리에서 시작됩니다. 매일 인스턴트식품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던 리카는 이제 스스로를 위해 요리할 줄 알고 음식을 즐기는 법을 알게 되죠.
소설 마지막에 리카가 지인들을 초대해 칠면조 요리를 대접하는 장면에서는 그동안 리카를 속박하던 것들이 해소되는 듯한 희망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곡된 가치관을 가지고 자신을 가둔 가지이와는 달리, 제대로 앞을 보고 나아가고자 하는 리카의 모습이 반짝반짝 빛나 보였어요. 책 속 인물이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었고, 저 또한 스스로에게 응원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래 너무 애쓰지 말자.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쳐서 다행이야!"
'언젠가'를 믿을 수 있는 여유나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있었으면 좋았을지 모르겠네요. '언젠가'를 믿는 것은 약한 것도 어리석은 것도 도망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언젠가', 시간을 듬뿍 들여서 칠면조구이를 할 거예요. 나의 즐거움을 위해. 만약 당신의 혐의가 벗겨져 석방된다면 나의 칠면조구이를 먹으러 와주세요, 꼭.
만약 신이 있다면 우리가 주어진 시련에 괴로워하는 모습에 만족하거나 기뻐할 리 없잖아. 그러니까 뭐든 다 자기 힘으로 극복해야 하는 건 아닐지도 몰라. 계속 성장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마치는 게 훨씬 더 중요해.
4. 그 외 인상적인 문장들
요리책에 소금 적당량이나 소금 약간, 이라고 나오지? 요즘은 그렇게 개인 재량에 맡기는 표기를 하면 항의가 들어온다고 하더라. 뭐랄까, 절대로 실패하고 싶지 않고, 자신의 적당량을 가늠할 자신도 없는 사람이 늘어난 것 같다고 했어. 요리란 곧 시행착오인데 말이야. 한 가지만으로 배를 채우지 않아도 되고, 모든 것에서 남들 수준을 목표로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야. 각자 자신의 적당량을 즐기고, 인생을 전체적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텐데. 담배도 식후에 한 개비쯤 즐겨도 되고, 살이 좀 쪘다고 주위에서 난리 칠 일도 아니잖아.
- 리카의 친구 '레이코' -
가지이 : 갓 구운 과자 맛도 모르고 어른이 된 사람은 도저히 만회할 수 없을 만큼 불행해.
리카 : 엄마가 과자를 만들어주지 않아도 얼마든지 그 맛을 알 방법은 있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과자를 만들어보고 알았어요. 결국 시간을 낼 수 있나 없나의 문제이지 않을까요. 요리와 애정은 전연 다른 게 아닐까요. 애초에 요리와 애정을 뒤죽박죽 섞어서 생각하니 당신이 사귄 남성들은 당신에게 휘둘리고 그토록 피폐해져서 목숨을 잃은 게 아닐까요..
우리는 평소에는 뭐하는지도 모르는 사이로, 함께 요리를 하며 즐겼거든요. 지금도 그래요. 배를 만들어서 먼바다에 띄우는 것과 비슷해요. 힘을 합쳐 먹고 싶은 것을 만들어서 그저 먹는 거죠. 안전망이에요, 그 요리교실은. 일에 지쳐서 가족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지만, 이 요리교실에 다닐 수 있도록 꼭 시간을 내고 일찍 퇴근해요.
- 요리교실 '살롱 드 미유코'의 멤버 '치즈' -
나에게 있어 안전망은 무엇일까..?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티스토리를 쓰고.. 그게 나의 안전망~~😊
다이어트만큼 무의미하고 쓸데없고 지성과 동떨어진 행위는 없어요. 당신 대체 무엇 때문에 살을 빼려는 거예요? 남자들 눈을 의식해서? 그렇다면 걱정 없어요. 남자는 원래 푸근하고 풍만한 여자를 좋아해요. 마른 체형의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자기한테 자신이 없어서 예외 없이 비굴해요. 성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금전적으로도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죠.
- 가지이 -
절대 불평이나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 강함이라고 믿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강함은 강함이 아니고, 리카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데..
아버지는 집안 형편이 힘들어질수록 무뚝뚝하게 입을 다물고, 매일 밤 술을 마시러 다니다 새벽에 귀가했다. 엄마도 리카도 집안의 기둥이 되어주길 바라지 않았는데. 가족을 지켜봐 주면 그걸로 족했다.
아버지에게 더 기댔더라면, 세상이 바라는 좋은 아내, 좋은 딸답게 더 능숙하게 아버지를 손바닥에서 굴리며 저글링 하듯 비위를 잘 맞췄더라면 가족이 함께 사는 길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노력으로 이루어진 관계는 가짜이고 잘못된 거란 사실을 알면서.
병행하려고 했었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 이용해서. 주위에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지. 그렇지만 난 초인이 아니었어. 그게 나쁜 것도 아닌데, 초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믿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있지,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어. 조금쯤 민폐를 끼쳐도 괜찮았을 텐데, 하는. 내가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혼자 다 안은 채 아무한테도 약한 소리 하지 않았던 탓에, 마치다 씨처럼 젊은 사람들이 그 빚을 갚게 되었다는 생각도 들어. 나는 응석을 부리지 않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응석을 차단하기도 했던 것 같아.
- 리카의 직장선배 '미즈시마' -
리카 : 다른 여성이 아니라, 나 자신이 구원받고 싶은 건지도 모릅니다. 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얘기해주지 않겠어요?
가지이 : 어째서?
리카 : 그건, 내가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가지이 : 친구는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은 숭배자뿐, 친구 따위 필요 없어.
누구보다 친구를 원하고, 리카를 필요로 하면서도 솔직하지 못한 가지이..
벽을 만든다는 건 으스대며 타인을 거절하는 게 아니다. 혼자 작업에 몰두하여 자신의 보루를 지키는 게 아닐까. 벽의 소재는 단단한 벽돌이나 콘크리트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과자여도 좋다.
자기 자신을 백 퍼센트 긍정하고, 배짱 두둑하고, 아무런 주저함도 없어 보이는 당신한테 끌렸던 건 인정해요. 그러나 레이코가, 아니 우리가, 귀찮고 성가셔도 일일이 사람 대 사람으로 정면에서 부딪히는 것은.. 당신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내게는 당신 쪽이 훨씬 약한 인간으로 보여요. 보기 싫은 것은 아예 보지 않으려 하고,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는 쪽이라면 전부 없는 것 취급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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