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종이책으로 '미우라 시온'의 <배를 엮다>를 읽었습니다.☺️
읽고 나니 이 책만큼은 꼭 종이책으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몇 년 전에 일본 영화 <후네오 아무(舟を編む)>를 봤는데요. 마츠다 류헤이, 미야자키 아오이, 오다기리 조까지.. 다 좋아하는 배우들이기도 했지만 영화 자체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뭔가 가슴 따뜻해지고 뭉클해지는, 여운이 남는 좋은 영화였어요.
우리나라에서는 <행복한 사전>이라는 제목으로 2014년에 개봉되었는데 원제목 그대로 번역하여 '배를 엮다'라고 하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영화 제목은 전혀 다르지만, 책은 또 '배를 엮다' 그대로 번역되었어요. 통일하는 게 헷갈리지 않고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배를 엮다>는 2012년 '일본 서점대상' 1위를 수상한 작품입니다. '일본 서점대상'은 일반 문학상과는 다르게 전국 서점 직원들의 투표로 수상작이 결정되는데요. '나오키상'이나 '아쿠타가와상'보다 좀 더 대중적이고 오락성이 보장되는 소설들이 많습니다.
<나의 평점 : 3.7 / 5.0>
가독성 : ★★★☆
재미 : ★★★☆
여운 : ★★★★
1. 줄거리/개요
사전이라는 '배'를 편집하고 '엮는' 사람들의 고군분투 스토리
대형 출판사 겐부쇼보 사전편집부. 베테랑 편집자 아라키가 정년 퇴임으로 그만두면 편집부에는 가볍기 그지없는 니시오카와 계약사원 사사키만 남게 된다. 자신의 후임자를 찾기로 한 아라키는 영업부에서 특이한 녀석으로 취급받고 있는 마지메를 알게 되어 사전편집부로 영입한다.
마지메가 투입된 사전편집부는 새로운 사전 <대도해> 편찬에 힘을 쏟고 있다. 마지메는 단숨에 사전 만들기에 빠져 든다. 그러던 어느 날 하숙집 주인 할머니의 손녀 가구야를 만나 한눈에 반하게 되는데.. 갑작스러운 사랑의 시작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마지메. 가구야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편지를 쓴다. 그러는 와중 <대도해> 편찬이 중지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과연 <대도해>는 완성될 수 있을까? 마지메는 가구야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전할 수 있을까?..
2. 주요 등장인물
마지메 미츠야 : 27세 → 40세. 겐부쇼보의 사전 편집원. 이름처럼(마지메는 일본어로 '성실하다, 진지하다'라는 뜻) 너무 진지해서 재미가 없는 성격이지만, 날카로운 언어적 센스와 집념을 가지고 사전 <대도해> 편찬의 큰 축을 담당하게 된다. 하숙집 주인 할머니의 손녀 가구야에게 반한다.
하야시 가구야 : 27세 → 40세. 마지메가 묵고 있는 하숙집 주인 타케 씨의 손녀. 요리를 배우고 있어 음식점 '우메노미'에서 일하고 있다.
니시오카 마사시 : 27세 → 40세. 입사 5년 차 사전 편집원. 마지메보다 먼저 사전편집부에 왔지만 나중에 광고선전부로 이동하게 된다. 매사 가벼운 듯 보이지만 소신껏 자기 할 말을 하며 현실적인 성격이다.
아라키 코헤이 : 베테랑 편집자. 정년 은퇴를 앞두고 <대도해>의 편찬을 위해 인재를 물색한다. 마지메의 재능을 발견하고 사전 편집부로 영입한다.
사사키 카오루 : 사전 편집부 계약사원. 일처리가 빠르고 13년 후에도 계속 근무하면서 마지메를 지탱해준다.
기시베 미도리 : 13년 후에 등장하는 사전 편집부원. 처음엔 마지메에 대해 의문 투성이었지만 점차 마지메를 이해하게 되고 사전 편집일에 열정적으로 임하게 된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우리를 향한 뜨거운 응원
말, 관계, 성실함, 열정...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찬사
3. 리뷰
어째서 새 사전 이름을 <대도해>(大渡海 : 큰 바다를 건너다)라고 정했는지 아는가?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야.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 36p, 아라키 -
종이 사전을 쓴 게 언제인가 싶어요. 중학교 때 처음 산 일본어 사전이 아직도 책장에 꽂혀있는데 마지막으로 펼친 건 기억도 안 나네요. 전자사전이 등장하고, 지금은 휴대폰으로 손쉽게 인터넷 사전을 이용할 수 있죠. 시대가 바뀌고 이제는 종이 사전을 펼칠 일이 없습니다. 사전의 형태는 바뀌었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 열심히 말을 모으고 그 말의 보편타당하면서도 시대에 맞는 의미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을 겁니다. 사전을 만든다는 것이 이렇게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 것인 줄 몰랐어요. 뭔가 뚝딱 만들어진 것 같은 당연함이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사전도 결국 사람이 만드는 것인데 말이죠. 잊혀져 가는 종이 사전이 문득 그립습니다.😌
요리인 : 요리를 업(業)으로 하는 사람.
이 '업'은 근무나 일이라는 의미이지만, 그 이상의 깊이도 느껴진다. '천명'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요리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 요리를 해서 많은 사람들의 배와 마음을 채우라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선택받은 사람. 가구야 씨도, 아마 나도 '업'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 115p, 마지메 -
<배를 엮다>는 일종의 직업 소설이자, 장인 소설입니다. 마지메, 아라키, 마쓰모토는 그야말로 일본의 장인 정신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저 성실하고 요령도 없는 마지메지만, 마지메처럼 무언가에 그토록 미친 듯이 빠진 적이 있었는지.. 빠진다는 말로는 부족하지요. 마지메가 말한 '업', 즉 '운명'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기까지 고군분투하며 달리던 젊은 날도 분명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초심을 잃고 즐거움은 쏙 빼고, 그저 일로써 노동으로써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권의 사전을 만들기 위해 묵묵히 노력하고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그들이 너무 대단하고 또 부러웠습니다.
당신을 만난 그날부터 달에 사는 것처럼 마음이 괴로워 호흡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지금 저의 심정을 솔직하게 전한다면 '가구야, 가구야, 그대를 어찌할 거나' 이런 마음입니다. 말로 다하자면 수명이 150년이어도 부족하고, 열대우림을 다 채벌해야 할 만큼의 종이를 써 버릴 것 같아서 이쯤에서 붓을 놓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고 가구야 씨의 생각을 들려주시면 기쁘겠습니다. 어떤 대답이든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엄숙히 받아들이겠습니다.
- 232~234p, 마지메가 가구야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中 -
'좋아합니다' 한 마디만 하면 될 걸..ㅋㅋ 답답해 보여도 어떻게든 마음을 전하고 싶은 절절함이 느껴지는 마지메의 러브레터에서, 그 말투와 내용의 진지함에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잊고 지냈던 아날로그적 감성과 말의 진중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매일 빠르게 돌아가는 생활 속에서 손쉽게 그리고 가볍게 보내는 문자들..
여고 시절에 친구들과 야자시간에 주고받았던 손 편지가 생각났어요. 내 마음을 더 솔직하게 탐색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을 담아 마음을 전하려고 했었는데요.. 그래서 더 기억에 남고 소중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몰두할 수 있는지, 수수께끼라고밖에 할 수 없다. 보기 괴로울 때조차 있었다. 하지만 만약에 내게도 마지메의 '사전'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문득 그런 상상을 했다. 분명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세계가 눈에 비치겠지. 가슴 터질 것 같은 빛을 띤 세계다.
- 153p, 니시오카 -
마지메만큼이나 매력적인 캐릭터 니시오카. 영화에서는 '오다기리 조'가 배역을 맡았습니다!! ㅎㅎ😆 툭툭 내뱉는 그의 현실적인 대사가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고 그래서 더 토닥토닥 보듬어주고 싶었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한평생을 바친 마지메나 아라키 같은 사람도 있는 반면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적당히 직장 생활을 하며 사는 니시오카 같은 사람이 주변에 더 많지 않을까요. 무언가에도 깊이 빠져들지 못하는 니시오카지만 마지메를 만난 후로 일과 사랑의 의미에 대해 돌이켜보고 자신의 위치를 나름의 방법으로 찾아나갑니다. 그런 니시오카의 변화하는 내면 묘사가 좋았어요.
죽은 이와 이어지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과 이어지기 위해 사람은 말을 만들었다. 우리는 배를 만들었다. 태고부터 미래로 면면히 이어지는 사람의 혼을 태우고, 풍요로운 말의 바다를 나아갈 배를. 사전 편찬에 끝은 없다. 희망을 싣고, 넓은 바다를 가는 배의 항로에 끝은 없다.
- 328~329p, 마지메 -
1년 전만 해도 저는 부끄럽지만 심각한 책 편식주의자였어요. 거의 추리소설만 읽었습니다;; ㅋㅋ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조금씩 다른 장르에도 도전하고 있는데, 추리소설만큼의 가독성과 긴박함, 반전과 같은 자극적 요소는 부족하지만, 읽고 나서 많은 걸 생각할 수 있게 되어 뭔가 저의 내면이 더 성장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며 진심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일과 목표, 삶의 태도, 인간관계 등을 돌아볼 수 있었어요. 감동과 설렘, 그리고 깊은 여운이 남는 소설이었습니다.☺️
4. 그 외 남기고 싶은 문장들
얼핏 보아서는 무기질한 단어의 나열이지만, 이 막대한 수의 표제어와 뜻풀이와 예문은 모두 누군가가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쓴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끈기인가. 얼마나 대단한 말에 대한 집념인가.
- 9p -
연애[戀愛] : 특정 이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껴 고양된 기분으로 둘이서만 함께 있고 싶고, 정신적인 일체감을 나누고 싶어 하며, 가능하다면 육체적인 일체감도 얻길 바라면서, 이루어지지 않아 안타까워하거나 드물게는 이루어져서 환희하는 상태에 있는 것.
- 53p -
사전은 상품이다. 빠져들어서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딘가에서 절충해야 한다. 아무리 완벽을 기해도 말은 생물처럼 움직인다. 사전은 진실한 의미에서 '완성'을 하지 못하는 서적이다. 너무 빠져들면 '여기까지 하고 그다음은 세상에 물어보자'하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된다.
- 113p, 니시오카 -
중요한 것은 좋은 사전을 완성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걸어 사전을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회사 동료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서포트할 수 있는가, 이다.
누군가의 열정에는 열정으로 응할 것.
- 179p, 니시오카 -
한정된 시간밖에 갖지 못한 인간이 힘을 다해 넓고 깊은 말의 바다로 저어 나간다. 무섭지만 즐겁다. 그만두고 싶지 않다.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언제까지고 이 배를 계속 타고 싶다.
- 186p -
말로는 좀처럼 전해지지 않는 것에, 서로 통하지 않는 것에 초조했다. 그러나 결국은 용기 내어 마음을 표현한 서툰 말을 보낼 수밖에 없다. 상대가 받아 주길 바라며.
마지메 씨는 말에 얽힌 불안과 희망을 실감하기 때문에 더욱 말이 가득 채워진 사전을 열심히 만들려고 한 게 아닐까.
- 236p, 기시베 -
사전을 만들면서 말과 진심으로 마주 서게 되고서야 나는 조금 달라진 느낌이 든다. 말이 갖는 힘. 상처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누군가와 이어지기 위한 힘을 자각하게 된 뒤로, 자신의 마음을 탐색하고 주위 사람의 기분과 생각을 주의 깊게 헤아리려 애쓰게 됐다.
- 258p, 기시베 -
당신과 마지메 씨 같은 편집자를 만나서 정말로 기뻤습니다. 당신들 덕분에 내 생은 더할 수 없이 충실해졌습니다. 감사라는 말 이상의 말이 없는지, 저 세상이 있다면 저 세상에서 용례 채집을 할 생각입니다. <대도해>를 편찬하는 날들이 얼마나 즐거웠던지요. 여러분의, <대도해>의, 끝없이 행복한 항해를 기도합니다.
- 327p, 마쓰모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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